농촌진흥청, 수원시 권선구 서둔동 52년 살림살이 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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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진흥청, 수원시 권선구 서둔동 52년 살림살이 접다
  • 전철규 기자
  • 승인 2015.04.23 0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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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수원시 권선구 서둔동 둥지를 튼 농진청.
농촌진흥청, 수원시 권선구 서둔동 52년 살림살이 접다(구 농촌진흥청)...ⓒ경기타임스

농촌진흥청은 개청 당시의 농업 구호는 '5천년 묵은 농사 5개년에 탈피 생과 미래까지다.
'.
그리고 현재 이전한 자리에 '농업은 생명 농촌은 미래'가 씌여져 있다.

전 국민의 배고픔을 없애기 위한 농업 연구와 기술 보급을 목표로 출발한 농진청이 52년 수원 생활을 마무리했다.

농진청은 2014년 9월 본청과 국립농업과학원을 시작으로 전북 전주시 만성동과 전북 완주군 이서면으로 이전했다.

이곳에 둥지를 튼 농촌진흥청 청사는 부지면적 640만9천㎡, 시설면적 31만5천㎡ 규모로 건설됐으며 본청과 4개의 소속기관, 직원 1천684명(정규직)이 입주했다.

■농진청의 역사

▶농진청의 수원 역사는 50여년 동안 사용된 여러 농업, 농촌 구호가 잘 설명해준다.

농진청은 1962년 농촌진흥법 제정으로 지금의 이름을 지니게 됐다. 이때 등장한 게 '5천년 묵은 농사 5개년에 탈피하자'는 것이었다.

5천년 동안 입과 손으로만 전해져온 재래식 농법에서 벗어나 과학적으로 인과관계가 명확한 농법을 개발하고 보급하자는 뜻으로 5월 농진청 청사가 준공되면서 본관 정면에 내걸렸다.

과학농법이 도입되고 새마을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던 1970년대, 농진청은 구체적 구호로 국민적 요구 사항을 반영했다.

당시 사용한 구호는 '쌀·보리·콩의 자급 지속화 - 녹색혁명의 완수'였다.

이 시기 농진청은 가장 화려했다. 1972년 농진청이 개발해 첫 재배를 시작한 다수확 벼 품종 '통일벼'는 당시 군사정권이 갈망했던 주곡 자급을 혁명처럼 가져왔다.

혁명완수의 정점은 '무미일'(無米日, 쌀을 먹지 않는 날) 폐지였다. 도시락에 쌀밥을 싸온 학생에게 회초리를 들게 만들었던 무미일은 1977년 1월11일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같은 해 12월 박정희 대통령은 '녹색혁명성취'라는 휘호를 농진청에게 선물했고 농진청 대강당을 '녹색혁명의 산실'로 명명했다. 무미일과 달리 100% 쌀 막걸리는 이때 부활했다.

■1980년-1990년 탈농 구호는

▶1980년대를 풍미한 구호는 '선진농업 기술혁신'이었다.

주곡 쌀의 자급화가 이뤄짐에 따라 벼농사 외의 다양한 분야에서 새로운 소득원 개발이 요구됐고 벼농사 분야에서도 지역 특성에 맞는 재배 기술이 필요해져 처음으로 '선진'이란 단어가 사용됐다.

농진청은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벼농사와 축산, 채소, 과일 등을 결합한 복합영농의 개념을 1980년대 도입했다.

동시에 산업화로 탈농이 가속화되자 농진청은 새로운 구호로 '풍요로운 복지농촌 건설'을 내놓았다.

농촌을 쾌적한 삶의 터전으로 가꾸고 도시와 농촌의 문화적 격차를 줄여 돌아오는 농촌으로 만들자는 의미였지만 산업화라는 급속 열차에 탑승한 대한민국호의 이농을 막을 간이역은 없었다.

1990년대 농진청이 내세운 구호에는 '첨단'과 '지식'이라는 단어가 많이 사용됐다.

농수산물 수입 개방으로 각 작물의 국제 경쟁력이 필수인 상황이 되자 '첨단기술농업으로 제2녹색혁명 성취'라는 구호와 농업을 통해 국가의 품격을 높이자는 의미의 '새기술 지식농업 세계속의 한국농업'이라는 구호가 등장했다.

첫번째 녹색혁명의 강렬한 기억이 남아 있는 농진청에 제2의 녹색혁명이 절실히 요구됐으나 결국 두번째 혁명은 없었다.

 

전북 전주시 만성동과 전북 완주군 이서면의 농촌진흥청 전경ⓒ경기타임스

■농진청의 시련은....그리고 미래?

▶결국 2000년대 들어 농진청은 큰 시련과 만난다.

2008년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기 직전 대통령직 인수위는 농업·임업·축산업 관련 연구개발은 최근 각광받고 있는 생명공학과 밀접한 관련이 있고 이런 연구개발은 경직된 공무원 조직이 담당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는 이유로 농진청을 폐지하고 정부출연 연구기관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밝혔다.

마른 하늘의 날벼락이라고 할수도 있겠지만 2005년 농진청이 내놓은 구호는 이미 생명공학의 중요성을 담고 있었다.

당시 공모를 통해 선정한 구호는 '농업은 생명 농촌은 미래'였다. 농업이 사양산업이 아닌 미래의 생명을 잉태하고 보존하는 첨단 산업임을 강조하는 구호였지만 구호만으로는 국민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 없음을 농진청은 2008년 알게 된다.

2008년 농업인 단체의 요구와 뼈를 깎는 자구 노력으로 폐지의 위기에서 벗어났지만 농진청은 여전히 두번째 녹색혁명을 주문받고 있다.

농촌진흥청은 이웃하고 있는 서울대학교 농생명과학대학과 더불어 반세기 동안 우리나라 농업과학기술 개발과 농촌지도사업, 교육사업을 통해 농업인과 농촌 발전에 기여했다.

농촌진흥청의 수원시대가 남긴 가장 큰 성과는 ‘녹색혁명’과 ‘백색혁명’ 그리고 선진 농업인을 키워낸 ‘인재혁명’, 3가지를 꼽을 수 있다.

수원에서 보낸 세월을 뒤로 하고 농촌진흥청은 전북 혁신도시 내 농업생명연구단지에 새 둥지를 마련했다.

다만, 수원의 현재 본청 건물 주변, 서호와 그 주변의 논 등 약 86만5천㎡(26만 평)에 연구시설 57개를 남겨 중북부 지역에 적합한 식량 작물 육성과 재배 기술 개발을 돕고 중북부 지역의 연구기능 공백을 최소화할 계획이다.

농진청의 수원 역사를 마무리하는 구호는 10년 가까이 걸려 있는 '농업은 생명 농촌은 미래'다.

생명과 미래를 연구하고 보급하겠다는 농진청의 노력과 구호가 대한민국 농업, 농촌의 미래 뿐 아니라 농촌진흥청의 전북 시대 미래까지 책임질지 지켜볼 일이다.

■ 농촌진흥청, 수원시민의 품으로

▶농촌진흥청 부지가 정조시대부터 농업발전의 메카였던 점을 고려해 역사·문화적 상징성을 보전하기 위해 중앙부처와 수차례 협의과정을 거쳐 총 4천여억원을 투입해 농어업문화전시체험관을 비롯한 시민공원을 조성해 시민들에게 돌려 줄 계획이다.
 
올해부터 연면적 약 4만5천㎡의 체험관을 건립할 예정이며 건립이 시작되면 일자리가 창출되고 유동인구도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장기적으로 서둔동의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는 핵심 요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국립원예특작과학원과 국립축산과학원, 국립종자원 등의 일대는 새로운 생활권의 중심거점으로 인구밀도 200인/ha의 중밀도 생활편익시설 및 주거용지 중심으로 개발해 나간다.
 
또 국립농업과학원 일대는 현 용도에 부합하는 계획으로, 국립식량과학원 일대는 권선행정타운과 연계한 중심상업 거점으로 형성할 계획이다.
 
염태영 수원시장은 “농어업 역사·문화·전시 체험관이 건립되고 관련 부지를 개방하면 서둔동민을 비롯한 수원시민에게 휴식공간이 되고, 관광지로써 외부인을 끌어들이는 요인이 되므로 서수원의 경제 회복에 매우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다.”라고 말했다.

염 시장은 또한 “건립을 준비하는 기간 내에 최대한 주변 환경을 보호하면서 자원을 활용하고, 주민 생활에 불편을 끼치지 않도록 관련 기관의 적극적인 협조를 부탁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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