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타임스] 11월 17일은 순국선열의 날이다. 이천의 명산 노승산의 산자락에 자리 잡은 국립이천호국원은 가을 단풍이 멋스러운 곳이다. 입구에 들어서면 현충탑이 우람하게 서 있다. 작열하게 내리쬐던 태양은 어느새 짧은 만남으로 잊혀지고 반가운 손님으로 기다려지는 계절, 마지막까지 형형색색 한껏 뽐을 내든 단풍들이 우수수 떨어지는 모습은 구한말시대 추풍낙옆처럼 사라져간 의병들을 떠올리게 한다.
예쁜 단풍잎을 책속에 꽃아 두었던 기억, 초등학교 시절에 겨우 몇 문장 긁적거렸던 일기장을 어느 날 우연히 발견했을 때 잊혀졌던 과거가 새록새록 떠오르는 경험을 해 본적이 있을 것이다. 몇 년 전 110년이 지난 1907년 경기도 양평군 지평 인근에서 영국 맥캔지 기자가 찍은 한 컷의 항일의병사진이 드라마를 통해 세상 밖으로 나와서 전하는 이야기에 푹 빠져 들었었다. 잊혀져가고, 잊혀졌던 아무개 열 두 명의 의병이 되살아나 항일의병이 재조명되면서 깊은 울림을 주었다.
일제강점기 35년은 가장 아픈 상처를 입은 한국사의 특수한 시기였다. 1905년 11월 17일 일본은 강제적으로 을사늑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였다. 1907년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약 9천 명의 병력을 지닌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하고, 1910년 8월 22일 한일병합조약 강제체결로 대한제국은 멸망하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 민족은 들불처럼 일어나 식민지 통치 초기 내내 일제에 맞서 싸웠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1907년부터 1910년까지 이름도 없이 전국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난 무명의 순국선열들이었다. 1907년 이후 해산한 군인들이 합류하고 의병대장으로 평민출신이 가담함으로써 강화된 조직력과 전투력으로 13도 창의군과 같은 연합부대를 편성하여 대규모의 서울진공작전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의병전쟁은 1908년과 1909년에 절정을 이루었다. 1908년에 일본인이 추정한 의병의 숫자가 69,832명에 달했고, 일본과는 거의 1,500여회의 충돌이 있었다. 이후 의병의 위협을 느낀 일본의 무참한 진압으로 의병 수는 1909년에 25,000명, 1910년경에는 2,000명 미만으로 떨어졌으며, 1907년부터 1910년까지 희생된 의병의 숫자는 무려 18,000여 명에 달했다.
비록 이러한 항일 투쟁은 일제를 몰아내는데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여러 해 동안 일제의 강점을 지연시켰다. 이후 만주나 연해주로 이동하여 지속적으로 독립군 또는 광복군과 연계하여 독립운동의 모태가 되었다.
1906년부터 2년간 대한제국에 머물면서 의병활동을 취재한 영국특파원 맥킨지의 시선을 통해 본 의병은 남루한 옷차림, 성한 것이 하나도 없는 총을 가지고, 너무 초라해 불쌍하고 딱했다고 했다.
그러나 “일본과 맞서 이기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어차피 싸우다 죽겠지만... 좋습니다. 노예가 되어 사느니, 죽는 길을 택하겠습니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살아있는 눈빛으로 말하고 있는 그들을 보며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에 ‘의병’으로 등록된 숫자는 2,648명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이름도 없이 오직 의병으로 환하게 뜨거웠다 사라진 불꽃같은 삶을 살아간 분들이다.
11월 17일은 순국선열의 날이다. 일제 식민지배가 극에 달했던 1939년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제정하였으며 1905년 이래로 을사늑약, 군대해산, 강제병합의 연이은 민족적 치욕에 분노하고 항의하며 자결한 민영환, 박승환, 황현 등의 순국지사, 목숨 걸고 끝까지 항의하다 이름 없이 사라진 순국선열들의 위훈을 기리기 위해 실질적으로 을사늑약이 늑결되었던 1905년 11월 17일을 순국선열 공동기념일로 제정하였음을 기억하자.
오늘의 이 소중한 평화와 자유는 순국선열들의 희생으로 누리고 있음을 생각하자. “눈부신 날이었다. 우리 모두는 불꽃이었고 모두가 뜨겁게 피고졌다.”고 말하는 그들은 우리들의 진정한 영웅이었다. 강력한 탄압 속에서도 목숨을 걸고 자유롭게 싸움을 선택한 진정한 자유인이었던 것이다. 앞으로 100년의 역사도 순국선열의 희생정신을 기억하고 함께하며 미래를 다져가는 계기가 되기를 간절히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