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타임스] 한국광복군! 독립을 향한 그 열정이 시간을 뛰어 넘어 제 가슴을 뛰게 한다. 나라 잃은 민족이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이역만리에 가서 창설한 한국광복군! 국내진공작전이 무산되지 않았더라면 해방 후 신탁통치의 혼란, 남북의 분단, 6.25 전쟁, 이 모든 것이 없었을 것이다. 너무나도 아쉬운 역사의 한 장면이다. 한국광복군의 고귀한 피가 민족을 위해 흘려졌다면, 우리 민족이 6.25 전쟁이라는 우리 역사상 가장 불행한 동족상잔으로 인한 피는 흘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친일의 잔재로 아직도 싸우고 있는 현실도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 한국광복군은 너무나 중요한 역사의 한 부분이다. 비록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한국광복군이 역할이 간과되어 역사의 한 장면으로 넘어가고 있지만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독립을 향한 민족의 열망과 그들이 흘린 고귀한 희생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한국광복군은 1940년에 김구 등의 주도하에 중국 충칭에서 창설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무장 독립군이다. 대한민국의 독립을 회복하기 위하여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연합군의 일원으로 항전할 것을 목적으로 창설되었다.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했으나 일본의 항복으로 무산되었고 1946년 6월 해체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에 대한민국육군임시군제를 제정하였으나 실현되지 못하다가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계기로 중국정부의 지원과 협조를 받게 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의 발발로 임시정부는 한국광복군 창설계획을 세웠으나 1940년 9월 17일이 되어서야 중국의 임시수도였던 충칭에서 광복군총사령부를 설립하였다.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광복선언문을 발표하며 “광복군은 한 중 두 나라의 독립을 회복하고자 공동의 적인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며 연합군의 일원으로 항전할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광복군창설의 취지를 천명하였다.
1941년 12월 8일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공격하면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임시정부는 12월 10일 대일선전포고를 발표하였다. 그리고 1942년 5월 김원봉이 주도하던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편입되었다.
조선의용대는 광복군 제1지대, 기존의 4개지대는 통합하여 제2지대로 편성되었다. 광복군은 한반도에 지하군을 조직하여 파기공작을 진행한다는 계획을 수립하였고, 태평양 방면에서의 한국인 포로 재훈련과 파견사령부 설치, 그리고 비행대편성 등에 관한 작전계획도 수립해놓았다.
1944년 한국광복군은 중국에 파견되어 있던 미국의 OSS(미국전략사무국)와 협약을 맺고 특수공작훈련을 실시하였다. 임시정부 주석 김구 선생님은 미국의 OSS 책임자와 한미 간의 공동작전을 협의하였고, 이들을 국내에 침투시킨다는 국내진공작전을 수행하기로 하였다.
그 내용은 OSS훈련을 받은 광복군에게 각종 비밀무기를 주어 산둥에서 미국잠수함에 태워 본국으로 들여보내 국내의 요소를 파괴하거나 혹은 점령하게 한 후에 미국비행기로 무기를 운반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런데 이 계획의 실행 직전에 일본이 항복하였다. 한국광복군의 고귀한 피가 흘려지지 않았고, 광복 이후 한국독립문제에 대하여 임시정부의 발언권이 없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해방이후 미군정은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고, 광복군에 대하여 무장해제를 요구하였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개인적으로 귀국할 수 밖에 없었고, 광복군도 무장을 해제한 상태로 귀국하였으며, 1946년 6월 광복군은 해체되었다.
역사는 이렇게 쓰여 졌다. 그러나 나라 잃은 민족이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이역만리에 가서 창설한 한국광복군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한국광복군은 우리 민족의 불굴의 혼이다. 우리는 영원히 한국광복군을 잊지 않을 것이다.